하와이 군도의 북서쪽 끝, 카우아이라는 섬이 있다. 1955년, 이 섬에서 698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들이 특별했던 건 아니다. 특별했던 건 어른들 쪽이었다. 소아과 의사, 정신과 의사, 사회복지사, 심리학자로 꾸려진 연구진이 이 해에 태어난 아이 전원을 추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 명도 고르지 않고, 한 명도 빼지 않고.
그리고 이 관찰은 30년 넘게 이어졌다. 심리학 역사상 가장 긴 호흡의 연구 중 하나 — 카우아이 종단연구다.
naroc이 창간호에서 체육 선생님 이야기를 하며 짧게 인용했던 그 연구를, 이번 호에서는 정면으로 다룬다. 자극적인 성공담이 아니라, 698명의 인생 데이터가 말해주는 것. 사람은 무엇으로 무너지고, 무엇으로 버티는가.
1955년, 한 섬에서 태어난 아이들 전부
연구를 이끈 사람은 발달심리학자 에미 워너(Emmy Werner)였다.
당시 심리학의 관심은 명확했다. 무엇이 아이를 망가뜨리는가. 가난, 부모의 불화, 질병, 알코올 중독 — 위험 요인을 찾아내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었다. 워너의 연구도 처음엔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다.
698명 중 상황이 특히 열악한 아이들이 있었다. 만성적인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 출생 전후로 문제를 겪었고, 가정은 불화나 부모의 정신질환·알코올 문제로 흔들리고 있었다. 위험 요인이 겹겹이 쌓인 고위험군 201명. 예측은 어렵지 않았다. 이 아이들 다수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찍 법적 문제를 겪고, 정신건강의 어려움을 안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실제로, 상당수는 예측대로 흘러갔다.
여기까지였다면 이 연구는 "환경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우울한 증명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데이터 속에 이상한 무리가 있었다.
같은 가난, 같은 불화 속에서 자랐는데,
왜 어떤 아이들은 무너지지 않았는가.
고위험군 201명 중 72명 — 약 3분의 1은 모든 예측을 배반했다. 학교에 잘 다녔고, 관계를 맺을 줄 알았고, 성실한 직업인이 됐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 워너는 이들을 이렇게 불렀다. "상처 입을 수 있었지만, 꺾이지 않은(vulnerable, but invincible)" 아이들.
연구의 질문이 뒤집힌 순간이었다. 무엇이 아이를 망가뜨리는가에서 — 무엇이 아이를 지켜내는가로.
3분의 1은 왜 무너지지 않았나
워너는 72명의 삶을 다시 파고들었다. 무너진 아이들에게 없었고, 버틴 아이들에게 있었던 것. 보호 요인(protective factors)이라 불리게 될 그 목록에서, 가장 일관되게 나타난 것이 하나 있었다.
꺾이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예외 없이, 아이의 처지를 조건 없이 이해하고 받아주는 “단 한 명의 어른”이 있었습니다. 부모인 경우도 있었지만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 조부모, 삼촌과 이모, 이웃, 교사, 목사. 혈연도, 자격도, 훈련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건 지속적인 관계 하나였습니다.
— Werner & Smith, Overcoming the Odds, 1992
주목할 것은 이 어른들이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비를 대준 것도, 인생 계획을 짜준 것도 아니다. 그들이 한 일은 소박하다 — 한 아이를 꾸준히 지켜봐 주는 것. 네가 어떤 상황에서 왔든, 너 자체로 괜찮다고 신호를 보내주는 것.
보호 요인은 그 밖에도 있었다. 워너가 정리한 목록은 크게 세 갈래다.
첫째, 관계. 위에서 말한 단 한 사람.
둘째, 역할. 꺾이지 않은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나 공동체 안에서 자기 몫의 일을 갖고 있었다. 동생을 돌보고, 집안일을 책임지고, 교회나 학교에서 맡은 자리가 있었다. 부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역할이 "나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만들어줬다.
셋째, 기질과 해석. 이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는 힘이 있었다. 불행을 부정하지 않되, 그것이 자기 존재의 전부라고 믿지 않는 것.
이 목록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한동안 두 번째 항목에서 멈춰 있었다. 창간호에서 썼던 체육 선생님 이야기 — 선생님이 내게 주신 건 위로가 아니라 체육반장이라는 역할이었다. 매트를 깔고 인원을 점검하는, 내가 안 하면 안 돌아가는 일. 워너의 목록과 정확히 겹친다. 관계가 먼저 있었고, 역할이 따라왔고, 해석이 바뀌었다.
30년 전 태평양의 한 섬에서 수집된 데이터가, 한국의 한 중학교 운동장에서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회복탄력성은 학습 가능한가
그래서, 제목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회복탄력성은 학습 가능한가.
카우아이 연구가 주는 답은 조심스럽지만 분명하다. 그렇다. 근거는 연구의 후반부에 있다. 워너 연구진은 대상자들을 30대, 이후 40대까지 계속 추적했는데, 거기서 중요한 발견이 하나 더 나온다. 10대 시절 문제를 겪으며 무너졌던 이들 중 상당수가 — 성인이 된 뒤에 회복했다.
계기는 다양했다. 군 복무에서 만난 상관, 직장에서 만난 선배, 배우자, 신앙 공동체. 형태는 달라도 구조는 같았다. 새로운 관계가 생겼고, 그 안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았고, 자기 삶을 다시 해석하게 됐다. 어린 시절에 작동했던 보호 요인이 어른의 삶에서도 똑같이 작동한 것이다.
회복탄력성이 타고나는 기질이라면 이런 늦은 회복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근육에 가깝다. 관계와 역할이라는 도구로, 몇 살에든 다시 기를 수 있는.
회복은 시기를 가리지 않았다.
늦게 피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이 저널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지금 무너져 있다면, 필요한 건 더 강한 의지가 아니라 한 사람과 한 역할이다. 지켜봐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런 사람이 있는 자리로 가야 하고 — 공동체든, 스터디든, 단골 가게의 사장님이든 — 맡은 몫이 없다면 작은 것 하나를 맡아야 한다. 의지는 그 다음에 따라온다.
그리고 반대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신이 지금 버티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보호 요인이 될 수 있다. 워너의 데이터가 보여줬듯 — 자격도, 훈련도, 혈연도 필요 없다. 한 사람을 꾸준히 지켜봐 주는 것. 그거면 통계를 배반하는 3분의 1이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이 저널의 자리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적어둔다. naroc이 그 '단 한 사람'이 되어줄 수는 없다. 그건 사람의 일이니까. 다만 매주 금요일, 같은 자리에서 질문 하나를 남겨두려 한다 — 당신의 기록이 쌓이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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