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분명 바빴다. 메신저에 수십 번 답했고, 회의를 세 개 했고, 메일함을 비웠고, 자잘한 요청을 다 쳐냈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하루를 돌아보면 — 오늘 내가 뭘 만들었지? 에 대한 답이 없다.
강의를 기획하는 일을 하면서 이 기분을 자주 만났다. 하루 종일 일했는데 기획안은 한 줄도 나아가지 않은 날. 그런 날이 이어지던 시기에 칼 뉴포트(Cal Newport)의 『Deep Work』를 읽었다. 조지타운대 컴퓨터공학 교수가 쓴 이 책은, 그 이상한 기분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준다.
당신은 바빴던 게 아니라, 얕았던 것이다.
바빴는데, 아무것도 쌓이지 않은 날
뉴포트의 구분은 단순하다.
깊은 일(deep work) — 방해 없는 집중 상태에서, 인지 능력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일.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실력을 늘리고, 남이 흉내 내기 어렵다.
얕은 일(shallow work) — 인지적 부담이 적은, 처리 위주의 일. 대개 산만한 상태로도 할 수 있고, 누가 해도 비슷하다.
중요한 건 얕은 일이 나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메일 회신도, 일정 조율도, 정산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문제는 비율이다. 얕은 일은 소리가 크다. 알림이 울리고, 사람이 기다리고, 끝내면 즉각 해소감이 온다. 깊은 일은 조용하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고, 오늘 안 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방치하면 하루는 자동으로 얕은 일로 채워진다. 그날 저녁의 이상한 공허함은 게으름의 증거가 아니라, 소리 큰 일에 밀려 조용한 일이 사라진 하루의 증거다.
얕은 일은 시간을 쓰고,
깊은 일은 시간을 쌓는다.
강의 기획자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커리큘럼의 뼈대를 세우는 두 시간은 3년 뒤에도 내 실력으로 남는다. 메신저에 답한 두 시간은 3일 뒤에도 기억나지 않는다. 같은 두 시간이 한쪽에서는 소비되고, 한쪽에서는 축적된다.
주의력은 이월된다
"그래도 나는 멀티태스킹이 되는데"라고 생각한다면 — 여기서 책이 인용하는 연구 하나를 보자.
경영학자 소피 르로이(Sophie Leroy)는 사람들이 작업을 전환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실험했습니다. 결과: 작업 A에서 B로 옮겨도 주의력의 일부는 A에 남습니다 — 주의 잔류(attention residue). 잔류가 클수록 B의 수행 성과는 낮아졌고, 특히 A를 끝내지 못한 채 전환할 때 잔류는 더 짙어졌습니다.
— Sophie Leroy, Why is it so hard to do my work?, 2009
기획안을 쓰다가 메신저에 답하고 돌아오는 30초. 체감상 대가는 30초지만, 실제 대가는 그 뒤 몇 분간 이어지는 흐려진 머리다. 하루에 이 전환을 수십 번 반복하면, 8시간 내내 일해도 온전한 정신으로 일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사양이다. 그래서 해법도 "더 집중하자"는 다짐이 아니라 전환 자체를 줄이는 구조여야 한다. 뉴포트가 제안하는 구조는 여러 가지지만 — 산속에 들어가는 수도승 방식부터 매 순간 몰입을 오가는 기자 방식까지 — 평범한 직장인에게 현실적인 답은 하나다.
리듬 철학(rhythmic philosophy).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이의 깊은 일 블록을 리듬처럼 반복하는 것. 의지로 몰입을 만드는 게 아니라, 몰입이 일어날 시간을 미리 달력에 박아두는 것이다.
오늘 8시간 중 몇 시간을 쌓았나
이론은 여기까지. 이제 막 시작한 나의 실험을 기록해둔다.
이 저널은 매주 금요일에 나간다. 처음엔 "시간 날 때 쓰자"였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 시간은 나지 않는다. 쫓기듯 쓰는 주가 반복되던 참에, 리듬 철학을 그대로 적용해보기로 했다. 목요일 밤 10시, 세상이 조용해진 뒤의 90분 — 저널 블록. 메신저가 잠들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이다.
시작 단계라 결과 대신 첫 소감만 적는다.
하나 — 90분은 생각보다 길다. 방해가 없는 90분은 방해받는 세 시간보다 멀리 간다. 이 글의 뼈대가 그 첫 블록에서 나왔다.
둘 — 예감컨대, 블록의 힘은 길이가 아니라 반복에서 올 것이다. 하루의 90분이 대단한 결과를 내는 게 아니라, 매주 쌓인 90분들이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아카이브가 되어 있는 것. 이 저널의 발행 리듬과 정확히 같은 원리다. 한 호는 얇지만, 호는 쌓인다.
이 실험이 몇 주 뒤에도 살아남았는지는, 살아남지 못했다면 왜였는지는 — 그때 다시 기록하겠다. 선언만 하고 사라지는 글이 되지 않도록.
그러니 계산해볼 일이다. 오늘 일한 8시간 중, 3년 뒤의 나에게 남는 시간은 몇 시간이었나. 그 답이 0에 가깝다면 필요한 건 자책이 아니라 블록 하나다. 거창할 것 없이 — 내일 아침, 지켜지는 90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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